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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국제성지

by jigeumdasiseumusal 2024.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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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지는 우연한 기회에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가본 곳이고 너무나도 가슴 아픈 곳이다.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그런일을 선조들이 받은 곳이다. 또한 명칭에서 국제 해미성지라고 하여 궁금했다.

교황님도 다녀가셨다는 성지! 

 

 해미국제성지(海美國際聖地, 영어: Haemi Sanctuarium Internationale)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 1로 13에 위치한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 순교 성지이다. 성지가 위치한 일대는 '여숫골'이라고도 불린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는데, 1872년까지 6년간 이어진 박해기간 동안에 붙잡힌 천주교 신자 약 1,0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잔인하게 처형 또는 생매장되었다.

 

생매장의 이유가 넘 어이가 없다. 일일이 죽이기 힘들어서 생매장했다는 것이다. ㅠㅠ 

산사람을 구덩이를 파고 밀어 넣고 돌과 흙으로 메꾸었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P, Barraux) 신부가 순교자들의 유해중 일부를 발굴해냄으로써 관군에 의해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발굴된 유해는 상홍리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져 와 보존 중이다. 성지 조성은 천주교 신자들 대상으로 홍보, 모금 활동을 벌여 부지를 확보하고 건립을 시작해 2003년 6월 17일 완료하였다.

 

유해 발굴도 우연히 발견됐다고 땅을 다지는데 뭔가 딱딱한 것이 삐쭉 나아서 보니가 뼈였다고, 그런데 그 뼈가 서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고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을까요.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선조들의 그런 고통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2014년 로마 교황청은 해미 순교자 3명을 가톨릭교회 공적 공경 대상인 복자로 추대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복자로 추대된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하였을 때 해미순교 성지도 직접 방문하였다.

 

'여숫골' 지명 유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관군은 많은 천주교인(천주학쟁이)들을 해미읍성으로 끌고 와서 처형하였다. 
그런데 그 수가 많아지자 이들을 해미천변으로 끌고 나가 생매장시키는 방식으로 처형하기 시작했다.
해미읍성 옥사에서 끌려 나온 천주교인들은 본능적으로 순교당할 것을 알고 해미천 변으로 끌려가면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짖으며 기도를 하였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예수 마리아"라는 기도소리가 "여수(여우의 방언) 머리"라고 들렸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의 일부가 모국어처럼 들리는 몬더그린 현상에 의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지역민들은 저들은 여수(여우)에게 홀렸으니 저렇게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이곳은 그때부터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몬더그린

처음 들어본다.

외국어에 대한 이해 부족, 연음, 부정확한 발음, 좋지 않은 음질 등으로 인해 본인이 알고 있는 다른 발음으로 들리는 현상. 특히 외국어의 발음의 일부 또는 전부가, 듣는 이의 모국어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일종의 현상을 일컫는다. 이 단어의 어원은 <머레이의 잘생긴 백작(The Bonny Earl of Murray)>이라는 스코틀랜드 발라드의 가사 중 "그리고 그를 풀밭에 눕혔네(And laid him on the green)"라는 구절을 "그리고 몬더그린 아가씨(And Lady Mondegreen)"로 잘못 알아들었다고 고백한 미국인 작가 실비아 라이트의 에세이에서 유래했다. <출처:나무위키>

 

역사적 배경

1985년 4월 해미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또 같은 해 6월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고, 대한민국의 가톨릭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홍보, 모금 활동을 펼쳤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98년 순교 성지 부지 약 2만 3100m 2를 확보하였다. 이어 1999년 5월부터 3000명의 회원으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았다. 2000년 8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2003년 6월 17일 성지 건립을 완료하였다. 대성당 아래의 12개 기둥에는 건립 후원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곳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다가 무명순교자들의 희생당한 곳에 그 유해를 보전하고 성당을 지었다. 박물관에는 그분들은 유해들이 일부보관되어 있었다.

성지 구성

해미에 위치한 8,903m2의 무명 순교자 성지 터에 지어졌다. 성지에는 전체면적 3234m2에 지상 4층, 700석 규모의 대성당과 200석 규모의 소성당을 지었다. 성당 뒤편에 위치한 기념관은 순교자의 무덤을 형상화하여 지었다. 기념관 내부에는 순교 기록화와 벽화 조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파수대를 상징하는 팔각의 탑과 사제관, 수녀원을 지었다.

 

이 밖에도 신자들을 묶어 물웅덩이에 빠뜨려 수장시킨 '진둠벙', 해미천 옆에서 생매장당한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 유해 발굴지에 조성된 노천성당,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에 있던 자리개 돌의 원석이 존재한다

여기를 지나면서 사람이 정말 잔인하구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사실 텔레비전에서 끔찍한 장면들이 나오면 안 보는 편이다.  묶어서 끌고 가다가 물웅덩이에 밀어서 죽인다니 정말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ㅠㅠ 이런 잔인한 역사가 있었다니. 두 번 다시는 없을 일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도 하지만 그 길이 정말 험난했네요. 

교황 방문과 시복

소성당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연설을 준비 중인 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이번 교황의 대한민국 방문은 역사상 두 번째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일 광화문 앞에서 교황 집전 아래 순교자 124위 시복식이 열렸다. 여기에는 해미 순교자인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의 3위가 함께 시복 되었다. 8월 17일에는 해미국제성지를 들러 유흥식 대전교구장 주교와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완섭 서산시장 등의 영접을 받은 뒤 아시아 주교단과의 만남과 오찬을 가졌다. 그리고 해미국제성지 기념관 앞에서 열린 해미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순교의 종교적 의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의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을 '순교'라고 표현한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순교는 신봉의 대상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 목숨을 바쳐 신앙의 증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순교 신심'이라고 표현한다. 해미국제성지 터에서의 순교는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이러한 순교 신심 정신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더불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과 해미 순교자 3위의 시복은 현세의 신자들에게 해미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배워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순교자들이 잡혀서 넘어오던 고개의 돌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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